남산의 동상 둘러보기
남산은 본래 목멱산으로 서울 사람들과 함께 애환의 세월을 건너왔다
서울 도성이 남산에 걸처져 있고 봉수대가 다섯곳에 있었다
치욕의 시절 남산 신궁이 있었고 앞남산에는 미군 통신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살던동네였다
박지원의 허생 도 남산자락에 살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깐깐한 선비들을 딸각발이 선비라 했다
구한말 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았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이 있던 왜성대에는
일본공사관이 들어섰다, 남산 아래 충무로와 명동 일대는 일본인 거주지가 되었고
남산에는 일제 신궁이 세워졌다 그래서 그곳에 민족혼을 말하는 선열들의
동상이 서있는 것이다
동상은 주로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국보 제1호인 남대문 (숭례문)
김유신 장군 동상
김유신(595 - 673)은 신라에 귀순한 가야왕국에 후손으로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당나라군을 격퇴하여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한 장군이다, 여기에서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는 미루기로 한다
힘차게 발을 내딛고 있는 말위에서 칼을 들고 지휘하고 있다
남성적 근육질이 도드라지는 이것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제국주의적 향수가 물씬 풍기고 남성적 진취적 기상을 보여준다
백범광장에 이시영 초대 부통령이 양쪽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대좌하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시영(1869 - 1953)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국권피탈후 전 재산을
처분하여 형 이회영을 비롯하여 6형제 일가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해방을 맞아 6형제중 살아서 돌아온 이는 이시영 혼자였다
1947년 성재학원 신흥대학( 현 경희대학교)을 설립하고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된다 1953년 4월 17일 피난처 부산에서 85세로 사망한다
전란 중에도 9일간의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뤄졌고 수유리 선열 묘역에 1964년 안장된다
1956년 8월 15일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진다
이승만 동상은 1955년 80회 탄신축하위원회(위원장 이기붕)의 발의로 세워졌다
동상의 높이는 81척 이었는데 세계최대라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보듯 엄청난
규모로 아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상을 만든 조각가는 윤효중으로 1944년 결전미술전에서 태평양전쟁의
일본 승리를 염원하는 "아버지의 영령에 맹세한다" 라는 작품으로 경성일보
사장상을 수상한 사람으로 친일인명 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이승만 동상은 허정내각에 의해 철거된 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대척점에
섰던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김구 서거 20주년을 맞아 동상건립을 추진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곽상훈)가 김구 서거 20주년을 맞아 동상건립을 추진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금일봉을 내놓았고 쌍용그룹 사주이자 공화당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씨도
500만원을 내놓았다, 조각은 김경승과 민복진이 맡았고 건립문은 소설가 박종화,
약전은 이은상이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모두 당대 한국에서 제일가는 예술인들 이었다고는 하나 김경승 친일작가가 여기에
참여 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48년 4월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 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남산 도서관 아래에 세워진 동상은 왼쪽에 책을 끼고오른손이 앞으로 나온걸 보면 걸어가는
모습을 표현한것 같다, 학자 임에도 남성성과 진취적 기상을 강조하고 있다
순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세웠고 조각은 윤영자, 글은 유흥렬이다
박영준 바침이라고 되어 있는데 박영준은 지금의 효성그룹이된 진흥기업 사장이다
퇴계 이황 선생 동상
다산 동상 옆으로 시립도서관 앞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이기이원론이라는 어려운 화두를 가지고 공부했던 학자 답게 도서관 앞에 세운것은
적절한 일이다, 동상의 모습이 교장선생 훈시하는 모습 보다는 성찰 하거나 고뇌하는
모습이었다면 좀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램이다
그의 이기이원론은 우리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화두이다
그것으로 공격받고 그것으로 인정 받았던 학자의 모습이 저런 모습일까
이기이원론은 율곡의 이기일원론과 부딪치면서 많은 정치적 입장들이 생겨났다
이(본질)와 기(현상)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본질이 발현하여 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성리학파 중에서 도덕적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율곡은 현상을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현산을 아주 중요하게
보고있지 않은가, 그런 어려운 사상적 고찰을 표현하는 조각상이였으면 한다
김소월의 산유화
옛날 남산 어린이 회관
남산도서관
남산 성곽 발굴터 위에 일제의 신궁터가 있다
안중근의사 동상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한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한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저격직후 태극기를 꺼내든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이다
현재 그의 동상과 기념관이 위치한 장소는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물이었던 남산 조선신궁이
있던 곳으로 항일운동의 역사에서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춘강 박승희 기념비
춘강 박승희 기념비는 1997년 12월 문화체육부가 민중계몽을 위해 조직된 극단인 토월회를
만들어 근대연극 발전의 기반을 다진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 박승희(1901 - 1964)의
애국정신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국립극장 안에 설립한 동상과 기념비이다
국립극장 들머리에 서있는 박승희의 흉상은 초라하다 셔츠차림의 젊은 연극인은
우수에 젖은 표정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국립극장에 흉상을 세운건 그대로 적격한
장소라 할 수 있지만 구석진 곳에 배치한 것은 흠이라 할수있다
이곳 부터는 장충단 공원이다
장충단공원은 조선말 을미사변을 겪으면서 일본의 만행으로 순직한 장졸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세워진 장충단에서 유래하였다
가수 배호의 장충단공원이라는 노래 가사에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공원에는 장단단비와 함께 사명대사 및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등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이 많다, 공원에 새겨진 이름과 뚜렷이 남은 글씨라 함은 장충단비의 비문이나
이 사람들의 동상에 새겨진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
유관순 열사 동상
이 동상은 1970년 남대문 녹지대에 건립한것을 1971년 지하철 건설로 이곳으로 옮겼다
유관순 동상은 치마폭을 휘날리며 오른손에 횃불을 치켜들고 군중 앞에서
전진을 외치는 선도자 형상이다
그러나 2020년 서대문 독립공원에 세워진 유관순 상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니까 고증에서 여러가지로 미흡하다는 말이다
서대문 독립공원의 유관순 동상은 과정에서 법정다툼이 있는등 복잡했지만 유관순에
대한 다양한 고증들을 거처 제작 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오른손에 횃불을 든 모습을 태극기로 바꾸고 치맛자락이 휘날리도록 맨발로
뛰고 있는 모습이 역동적이다
이곳의 유관순 상은 서양여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신발도 신었다
고무신 신고 몇발자국 뛰면 벗겨진다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외솔 최현배(894 - 1970)선생은 소년시절 나라형편을 개탄하며 주시경의 국어와
신채호의 국사에서 나라와 겨레를 마음에 간직하였다
한글보급에 힘써왔으며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리말을 가르칠수 없자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해방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한글연구에 평생을 바친 그는 말본의 체계를 확립하였고 한글전용 운동 및 가로쓰기
운동에 기여
이준 열사 동상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조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에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
장충단비
1895년 8월 일본의 난군과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이때 이경식과 홍계훈이 자객들을 저지 하다가 순사 하였고
그후 고종 임금은 1900년 옛 남소영터에 제단을 꾸며 을미사변 당시 순사한
두사람의 충신 및 군졸들의 혼을 받들고 이 제단의 이름을 장충단이라 하였다
사명대사
동국대 내에는 만해광장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있는 동상을 만해상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다행히 동대앞에 외진 곳이지만 사명대사상이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사명대사 동상 제막식에 박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장, 대법원장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지만 지금은 찾는이가 드문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언덕배기에 외로이
서있는 사명대사의 동상이다